원주 문막 근처에 가볼만한 곳을 포스팅해 본다. 반계리 은행나무를 보고 나서 허전한 마음을을 달래고 싶을때 부론 쪽으로 드라이브 가볼만한 추천 코스가 될듯 하다.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지역은 역사와 문화가 섬강을 따라 꽃 피웠던 과거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지금은 폐사지가 된 거돈사지와 법천사지 그리고 달랑 돌비석 하나 설치되고 흔적이 없는 흥원창을 돌아보면 느낀 것을 올려본다.
원주 부론 법천사지
법천사지는 폐사지로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 산 70-1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통일신라시대의 절터로 강원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절터는 무려 4만 3천 평 정도로 여겨지고,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어 고려시대 때까지 크게 융성했던 것으로 기록에 남아있다가 임진왜란 때 전소된 것으로 알고 있다.

법천사지는 농가와 농경지로 대부분 사용되고 있고, 지금은 적은 면적의 절터만 남아있으며, 현존하는 구조물로는 당간지주와 지광국사 현묘탑이 남이 있을 뿐이다.

법천사지 지광국사 현묘탑비
지광국사 현묘탑은 국보 101호로 지정되어 있고 현재 대전 국립문화연구소로 옮겨졌으며, 1086년 건립된 국보 59호로 지정된 지광국사 현묘탑비만 언덕 위에 우뚝 솟아 법천사지를 내려다보고 있다.
지광국사 현묘탑비와 절이 세워져 있던 자리만 덩그러니 남아있어 한때 영화를 누렸던 절터의 아픔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느낌이다.

탑비란? 승려의 출생에서 입적까지의 살아온 길을 적어 놓은 것으로 법천사지의 지광국사는 고려 선종 2년(1085년)에 지광국사의 삶과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지광국사는 원주 출생으로 21세에 승과에 급제하여 여러 왕들을 거치면서 국사를 하였고, 임금과 함께 어가를 타고 다녔으며, 문종 24년 (1070) 나이 87세에 이곳 법천사에서 입적하였다.
지광국사 탑비는 거북 모양의 받침돌 위에 몸돌을 세우고 왕관 모양의 머릿돌을 올린 모습으로 높이가 4.55m이다. 받침돌에 있는 거북의 얼굴은 자세히 보면 용의 얼굴과 비슷하고, 거북의 등껍질에는 사각형을 여러 개 그리고 그 안에 왕자를 새겨 장식한 접이 독특하다. 거돈사지의 탑에도 비슷한 문양이 새겨져 있다.

현재는 금당터와 덩그러니 폐사지를 지키고 있는 느티나무 한그루, 지광국사 탑은 온갖 수모를 겪으며 우리나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1911년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 골동품상 모리가 일본으로 불법으로 반출하였다 다른 일본인들에게 몇 번에 거쳐 매각이 되었고, 1912년 조선 총독 데라우치의 반환 명령으로 다시 우리나라로 돌아오게 된다.
그 후 명동성당 부근으로 이전했다 다시 경복궁 경회루 동편으로 이주하는 등 무려 9차례에 걸친 이주를 하였고 전쟁 당시 피폭으로 인해 무려 12,000조각으로 대파된 것을 1957년 시멘트를 이용해 복원하였다. 현재 경복궁 내 고궁박물관 앞에 존치되어 있다가 2015년 보존처리를 위해 대전 국립문화재연구소로 이전하였다.

당간지주는 법천사 터에서 남쪽으로 약 20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법천사가 융성할 때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당간지주는 절의 입구나 뜰에 설치하는데 현재의 절터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은 옛날의 절터가 그만큼 컸다는 것이겠지.
이곳의 당간지주는 높이가 3.9m로 당간지주의 크기로만 봐도 법천사가 엄청나게 컸던 절이라는 것이 느껴진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현재까지 잘 보존되고 있다.
정산리 거돈사지
원주 거돈사지는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정산리 189에 위치하고 있으며 통일신라 말기에서 고려시대까지 융성했던 절터이다.
거돈사지로 올라가면 막다른 길이고 한계산 기슭의 작은 골짜기를 끼고 있는 폐사지이다. 발굴 조사과정에서 신하 후기인 9세기경에 건립되어 고려 초기에 확장. 보수되어 조선 초기까지 융성했던 절이다.

원주 거돈사지 삼층석탑은 보물 제75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금당터 앞에 세워져 있는 탑으로 요즘 사찰에 가보면 대웅전 앞에 대부분 탑들이 세워져 있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건축물 배치가 비슷하긴 하다.
이곳의 삼층석탑은 2단의 기단으로 3층의 탑신을 올린 전형적인 신라 석탑의 모습이고, 돌로 된 축대 안에 흙을 쌓고 그 위에 탑을 세운점이 특이하다고 한다.
탑의 조성연대는 신라 말기로 보인다.

금당터 : 불상을 모시는 곳으로 사찰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보통은 대웅전이라고 부른다. 금당터 중앙에 불상을 모셨던 높이 약 2m 정도의 화강석 불대좌가 놓여있다. 거돈사지의 금당터는 주춧돌이 원형 그대로 남아있어 제법 큰 법당이었던으로 보인다.

거돈사지 원공국사 탑비
원공국사( 930년 ~ 1018년)의 법명은 지종이다. 국사의 생애와 행적, 덕을 기리는 내용이 담겨있으며 보물 제78호로 지정되어 있다.
거북 모양의 받침돌 위로 비의 몸체를 세우고 머릿돌을 얹은 형태의 비석으로 고려 현종 16년(1025)에 세운 것으로, 당시 ‘해동공자’로 불리던 최충이 글을 짓고, 김거웅이 글씨를 썼다. 비문에 새긴 글씨체는 해서체로 중국 구양순의 서법을 이어받은 것이라고 한다.

거북의 머리는 괴수의 모양으로 험한 인상을 한 용의 머리 모양이고 등에 새긴 무늬는 정육각형에 가까우며, 머릿돌에는 구름 속을 요동치는 용이 불꽃에 쌓인 여의주를 두고 다투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원공 대사의 성씨는 이 씨로 전주 출신이고, 이름은 지종, 자는 신 측이다. 930년에 출생하고 8세의 나이로 출가하여 946년 16세의 나이에 계를 받고, 23세에 선과에 합격하고 현종 때 왕사에 봉해지고 89세의 나이로 이곳 거돈사에서 입적하였다.

거돈사지 원공국사 탑은 보물 제19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고려 현종 16년(1025) 탑비와 함께 세워진 것이다.
원공국사 탑은 세 개의 받침돌로 이루어진 기단과 몸돌, 지붕돌로 이루어져 있으며, 8각을 이루고 있는 몸돌의 앞뒤 양면에는 자물쇠 모양을 하고, 좌우 양면에는 창문 모양을, 남은 네 면에는 사천왕상을 새겼다.

지붕돌은 서까래와 기왓골, 막새기와의 모양을 표현해 놓아 목조 건축물의 지붕 모습을 본떴고, 꼭대기에는 8 각형의 보개가 얹혀있다. 이곳에 있던 원래의 탑은 일제강점기 때 서울로 옮겨져 일본 사람의 집에 있었던 것을 1948년 경복궁으로 옮겨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 경내에 있고, 현재 이곳에 있는 탑은 2007년 다시 세운 것이다.

거돈사터는 약 7천600평 정도의 절터로 절터에는 중문터, 금당터, 강당터, 승방터, 회랑 등이 확인되었고, 금탕터의 주춧돌은 그대로 남아있다. 거돈사는 신라 말 고려초의 절터로서 보기 드문 일탑식 가람으로 주목할 만 곳이다. 거돈사에서 아래로 조금만 내려오면 거돈사 전시관이 있지만 지금은 개방하지 않고 있다.
흥원창
원주 문막 지역 가볼만한곳 마지막으로 소개할 곳은 바로 흥원창이다.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흥호리 1004 은섬포에 위치하고 있었던 조창이다. 세금으로 걷힌 쌀을 운송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으로 판관이 파견되어 창고와 운송업무를 관장했던 곳이다.

이곳은 섬강과 남한강이 합류하는 지점으로 양광도 소속의 원주와 그 주변 지역의 세곡을 모아 개경의 경창으로 운송하는 기능을 담당해던 한강 수계의 대표적인 조창 중 하나였다.

원주시 부론면에서 만나는 역사와 문화가 조용히 살아 숨 쉬고 있는 순레 길을 걸으면서 영광과 번성, 번창하면서도 분주했던 역사의 뒤안길이 아련히 떠오르는 과거로의 여행을 해보시는 것도 좋은 추억이 될 거라고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