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 오봉산 산행을 다녀 오며 들른 청평사 여행 후기를 자세히 남겨둡니다. 춘천은 가볼만한곳이 은근 많아 자주 가게 되네요.
춘천 청평사 가는 교통 정보
청평사는 강원도 춘천시 북산면 오봉산길 810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청평사 주차비 : 승용차 2,000원.
청평사 입장료 : 1인당 2,000원.

공주와 상사뱀의 전설 이야기

공주와 상사뱀의 전설
당나라 태종의 딸이 평민과 은밀하게 사랑을 나누게 되자 이에 격노한 태종은 청년을 사형에 처하자 원혼이 뱀으로 변하여 공주의 몸을 감은 상사뱀은 어떠한 수단을 동원해도 떨어지지 않자 공주는 점점 야위어만 가던 중 어떤 노승이 신라의 영험한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라는 권유에 유명 사찰을 순례하다 이곳 청평사까지 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해가 저물어 도착한 공주는 구송폭포 아래 작은 동굴에서 하룻 밥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 계곡에서 범종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오자 “종소리를 들어보니 절이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듯합니다. 절에 가서 밥을 얻어 오려고 하니 잠시 제 몸에서 내려와 주실 수 있는지요” 하니 그동안 한 번도 이런 부탁을 들어주지 않던 상사뱀이 웬일인지 순순히 몸을 풀어주었다.
공주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계곡에서 목욕을 하고 때마침 법회가 열리고 있는 법당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구송폭포
주변에 소나무 아홉 그루가 있다고 붙여진 이름으로 폭포 위쪽에 사람이 쉴 수 있는 구송대가 있다고 하네요. 구송 폭포는 환경의 변화에 따라 아홉 가지의 폭포 소리가 들린다고 하여 ‘구성폭포’라고도 합니다.
구송 폭포는 춘천 서면 삼악산의 등선폭포, 남산면의 구곡폭포와 함께 춘천의 3대 폭포라고 합니다.
한편, 상사뱀은 시간이 늦어지자 혹시 도망간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감에 공주를 찾아 나섰고, 절문인 회전문을 들어서려는데 순간 맑은 하늘에서 소나기와 함께 벼락이 내리쳐 상사뱀이 그 자리에서 죽고 불어난 빗물에 떠내려가 버렸다.
청평사 회전문

청평사 회전문은 보물 제164호로 청평사의 대문입니다. 조선 명종 5년(1550년)에 보우대사가 건립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가운데 칸을 출입문으로 하고 양쪽 한 칸씩은 사천왕의 조작상을 세우거나 사천왕 그림을 걸도록 하였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 문은 중생들이 윤회전생을 깨우치게 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불교의 경전을 두었던 윤장대를 돌린다는 의미에서 그 이름이 비롯된 것으로도 추정됩니다. 이 문을 지나자 공주에게 붙어 있던 상사뱀이 윤회를 벗어나 해탈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지기도 합니다. 물론 시기는 맞지 않지만…
법회를 마친 공주가 음식을 얻어 가지고 내려와 보니 뱀이 죽어 폭포에 둥둥 떠 있는 것이 아닌가. 영문을 알 수 없는 공주는 깜짝 놀랐으나 시원스럽기도 하고 애처롭기도 하여 상사뱀을 정성껏 묻어주었다. 이 소식을 들은 태종은 금 세 덩어리를 보내 법당과 공주가 거처할 건물을 세우게 하고 또 하나는 공주의 귀국 여비로 나머지는 후일 건물을 고칠 때 사용하라고 이곳 오봉산 어딘가에 묻어 두었다고 합니다.
3층 석탑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8호인 이 탑은 고려 초기에 건립된 석탑되었다고 합니다. 지붕돌인 3층 옥개석은 계곡에서 찾아 복원하고 3층 탑신석은 새로 만들어 얹은 것입니다. 이 탑 아래의 가파른 오솔길은 현재의 포장길이 생기기 전에 청평사를 오가던 옛길로, 환희령이라 불렸다. 탑은 대체로 법당 앞에 세우는데 이 탑은 절 주변 산의 암반 위에 세운 것이 특징입니다. 경주 남산의 용장사지 삼층석탑에서도 이러한 예를 찾을 수 있습니다.
공주는 상사뱀의 극락왕생을 빌며 오랫동안 이곳에서 머무르며 부처님의 은공에 감사드리다가 석탑을 세우고 귀국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공주가 머무르던 굴을 공주골, 목욕을 했던 곳을 공주탕, 삼층석탑은 공주탑으로도 불리고 있습니다.
사랑이란 헛된 이미지조차도 놓칠 수 없는 집착과 열망 때문에 사랑은 불꽃처럼 타오르다 불꽃이 강해질수록 심지는 짧아져 가니 , 사랑이 깊을수록 젊음은 봄날처럼 빠르게 소실되어 가는 것일 것입니다.

거북바위는 자연 암석으로 예전부터 거북이가 물을 바라보게 되면 청평사가 크게 융성할 것이라는 전설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 거북바위 아래쪽에 신규선이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이 사람은 1915년에 청평사를 정비하고 청평사의 역사책인 청평사지를 편찬하도록 한 사람입니다.
청평사 고려선원

춘천 청평사 고려선원 : 명승 제70호
청평사는 고려 광종 24년(973년)에 백암 선원으로 창건되어 1,000년 이상을 이어온 선원입니다. 고려시대에는 이자현, 운진 국사 승형, 이암, 나응선사 등이 머물렀고, 조선시대에는 김시습, 보우, 환적당, 환성당 등이 이곳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고려시대 이자현은 37년간 청평사에 머물면서 청평사 주변 계곡에 암자와 정자, 연못 등을 조성하였다고 합니다.

고려선원 앞에 있는 바위로 바위 위로 심생종종생, 심멸종종멸, 여시구멸이, 처처안락국이란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마음이 일어나면 모든 것들이 생겨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모든 것들이 사라지네, 이와 같이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나면 곳곳이 모두가 극락세계로구나.

고려시대 이자현이 조성한 것으로 조선 초기 김시습의 한시에도 언급되어있다. 영지는 전체적으로 직사각형의 연못으로 부용봉에 있던 견성암이 연못에 비친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고 하네요. 지금도 연못에 물결이 일지 않으면 부용봉이 물속에 그림자처럼 비치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아무리 보려고 해도 안보임.)
문수사 시장경비

이 비는 고려말 원나라에서 청평사에 보내온 대장경과 사찰 후원금에 대한 내용을 기록한 비석으로 당시 고려와 원나라 사이의 국제관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비석입니다. 고려말 대학자인 익재 이제현이 이 비문을 짓고 문하시중 이암이 비문을 썼으나 1800년대에 비석이 훼손되어 현재는 비석을 세울 때 받침돌로 썼던 비좌만 남아 있으며 비문은 탁본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유래와 역사

973년(광종 24년) 영헌선사가 창건하여 백암선원이라 하였고, 그 후 폐사가 되었다가 1068년 이의가 중건하고 보현원이라 하였으며, 1089년 의의의 아들인 이자현이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은거하자 도적이 없어지고 호랑이와 이리가 자취를 감추어 산 이름을 청평이라 하고 절 이름을 문수원이라 하였습니다. 그 후 견성암, 양신암, 칠성암, 등운암, 복희암, 지장암, 식암, 선동암 등 8개의 암자를 짓고 크게 중창하였지요.

진락공 이자현은 이 주변에 작은 암자 식암을 짓고 조용히 수양과 참선을 하면서 손과 발을 씻기 위하여 네모로 두 개의 구멍을 파 놓은 곳을 진락공 세수터라고 합니다.

이 탑은 1978년경 청평사 주지를 맡았던 향봉 스님이 탑 아래의 적멸보궁과 함께 건립하였습니다. 이때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모셔와 봉안하였다고 합니다.

청평식암은 진락공이 수양하던 곳으로 지금은 터만 남아 있고 건물의 잔재는 산산이 부서져 곳곳에 널려있습니다. 절벽에 청평식암이라고 음각되어 있습니다. 이자현의 유골을 질그릇에 담에 이곳 바위틈에 보관하였다고 합니다.

청평식암의 건물 잔해들로 보이는 깨진 기왓장, 기둥 파편 등이 도처에 널려있네요. 화무십일홍이고 권불십년이라고 하지만 부서지고 망가진 것을 보면 마음이 착잡해집니다.

척번대의 아랫쪽으로는 청평선동, 위쪽에는 청평식암이라는 이자현의 큰 새김글이 있습니다. 주변에는 나한전터 등 여러 건물 터와 폭포가 있습니다. 골짜기가 조용하고 전망이 좋아 수행자들이 이 바위에 앉아 참선수행을 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적멸보궁과 암자들이 있던 곳으로 들어가는 일주문인 듯합니다. 저 문의 크기로 봐서 규모가 큰 절이 있었던 듯합니다. 복원이 이루어지지 않고 방치되어 있는 일주문입니다.

환적당 의천의 부도와 알 수 없는 부도인 설화당 부도입니다.

가뭄이 들었을 때 하늘에 비가 오게 해달라고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기우제는 사찰에서도 지냈지만 마을에서 신성시하던 곳에서 제를 올리는 곳. 조선시대 서종화가 쓴 “약헌유고”의 청평산기에 기우제를 지내면 종종 감응이 있었다고 하였는데 이는 청평사에서 기우제를 정성스럽게 지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주변에는 자작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는 기운이 좋은 곳인 듯합니다.

공주가 목욕재계를 하였다는 곳으로 불교에서 목욕은 단순히 몸을 씻는다는 의미 외에도 착하지 마음까지도 함께 씻어 낸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진락공은 이자현이 죽고 난 후 임금이 내려준 이자현의 시호입니다. 이 부도는 진락공의 부도로 알려져 있지만 기록에 의하면 이자현의 유골은 질그릇으로 만든 함에 넣어 청평사 북쪽의 청평식암 근처 바위틈에 안치했다고 합니다.

청평사로 올라가기 전에 주변의 상가들로 식당과 슈퍼 등으로 깔끔하게 다시 조성하였네요. 다리 옆에는 전망대도 설치되어 있고요.
청평사 출렁다리???

청평사로 가기 전 상가에 새롭게 설치하고 있는 출렁다리.
오래된 침묵을 깨고 청평사 관광단지를 조성하고 있네요.

청평사에서 내려오면 다리 건너 배표를 파는 슈퍼가 있어요. 춘천에서 올때 왕복표를 구입하지 않았다면 이곳에서 배표를 구입하시고 선착장으로 가셔야 합니다. 선착장까지는 조금 걸어 가야합니다.
